자료코드 :
    06_02_02_MPN_20160722_KUS_0002
    조사장소 :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행복동 사무실
    조사일 :
    2016-07-22
    제보자 :
    김우숙(남, 76세, 1941년생)
    조사자 :
    이옥희, 신은정
    줄거리
    열 살에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지내다가 스무 살에 전주에 있는 한센인 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 있다 소록도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스무 살에 집을 나온 이후에는 고향집에는 다시 가 보지 못했다.
    내용
    겨울에 옛날에는 목화 면을 실로 안뺍니까? 인제 방 네 개에 물레를 쳐놓고 실을 빼는데, 인자 그때는 한 머 여남은 살(10살 정도), 6.25 나는 해에 10살인데. 이제 방 가운데서 친구들끼리 이래 막 바둠고(보둠고) 궁글고(구르고), 막 이래 노는데 이제 물팍(무릎)이 바지가 끌어 올래졌는데 여기에 이 빨~가이 이래 점이 있었어예. 그래가지고는 저저 지금은 인자 또 우자를 쓰다보니까 우숙이라 그라는데, 이제낏(지금까지) 지금 또숙이로 썼어예. 전국적으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지금도 들어오면 또숙이를 찾지 우숙이를 안 찾습니다. 또숙이로 그리 했는데 “또숙이, 저 물팍에 뭣이 빨간 점이 있다.” 그래가지고는 인자 불러다가 안쳐놓고는 어머니들이 이레(이렇게) 꼬집어예~. 이 빨간 점이 있는. [무릎을 가리키며] 또 요 자립니다. 요 자린데, 꼬집으면서는 “아프나? 안 아프나?” 그래 그거를 묻기 때문에 제가 “안 아프다.” 그럤습디다. “안 아프다.” 그라니까는 옛날 어머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또숙이가 풍벵(풍병)이다!” 그러니까 옛날 어른들은 우리 한센씨 병을 갖다가 풍병이다 그러니까는 우리 어머니가 “우리 집은 사립문 닫았다.” 고 그냥 목화 실 빼다가 막 대성통곡을 하고. 왜냐하면 헹님(형님)이 의용군에 끌려가가지고 행방불명이 돼 버렸지요. 아들이라 하는 것이 저거 하나 있는데, 그 한센씨 병이 들어가지고는 풍병이 걸렸다 그라니까는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고, 그냥 막 땅바닥을 치고 난리가 났는데…. [울먹이며] (조사자 : 어떻게 이렇게 꼬집어보고 금방 알아요? 아니면 또 다른 증세가 있으셨어요?) 다른 증세는 없었어예. 친구들끼리 반가운 데서(노는 데서) 보니까 꼬집어가지고 “그래 아프나? 안 아프나?” “안 아프다.” 그러니까는 “풍벵이다!” 그래가지고는 그냥 어머니가 “우리 집에는 사립문 닫았다.” 대성통곡을 하고 울고 난리가 났는데 그래, 가난해가지고 약도 몬썼다(못 썼다) 아닙니까? 약도 몬쓰고, 행님이 그래도 이북으로 안 넘어가고 포로로 잡혀 내려와가지고,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3년 만에 석방이 돼 가지고 나왔어예. 나와가지고는 뼈와 가죽만 남아가 왔는데, 그때는 그 처음에는 제주도 훈련소로 갔지마는 그 행님이 그 포로에서 나오고 난 뒤에는 훈련소가 포항입니다. 포항 훈련소로 가는데, 영장이 나와 가지고 이제 포항 훈련소로 이제 군 입대 하러 가야 되는데, 그 다리에다가 막 상처를 내가지고 갔어예. 가가지고 신체검사 떨어져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는데 또 그냥 곧 연달아 그냥 영장이 나와가지고는 군대를 갔습니다. 군대를 갔는데, 그때는 그 군대 생활이 그 3년 6개월인가 그래예. 3년 6개월인가, 그 저 뭐꼬 군대생활을 하고 제대를 해가지고 왔는데. 이제 행님하고 저하고 이제 산에 그 나무를 깔기(검불)를 긁어가지고 형님이 시내 져다가 팔아가지고 돈을 만들어가 식량을 팔아묵고 그래 살다가, 저가 이제 60년도에 20살 먹어서, 저가 그 진주 그 한센씨 병원이 있었는데 병원에 가가지고 입원을 했습니다. (조사자 : 계속 병이 더 심해져서 입원하신 건가요?) 제가 손에고 이 팔에고 다리고 전부 숭텁(흉터)니다. 왜냐면은 약을 안 쓰고 하니까는 전부 불에 데인 것맨키로(것처럼) 자고 나며는 불키고는(부르트고) 이래 상처가 나고, 상처가 나고. 가난하다 보니까는 치료를 몬하고, 가난하다 보니까는 치료를 안 하고는 진물로 질질 흘리고는 그래 살다보니까는. 저가 지금 발에 상처 자리가 틱틱 불거져가지고 있습니다. 그래가지고 제가 20살 먹어서 병원에 가가지고 입원을 하고, 형님은 결혼해가지고 이제 살림하시고. 이제 그러니까 저는 이제 집하고는, 이제 제가 60년도에 고향 샅 밖(고샅, 골목 밖) 나와 가지고는 지금까지 56년이니까, 56년 동안 저는 고향 샅 밖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20살 먹어서 나와가지고 지금 56년, 57년 동안 고향 살 밖을 못 밟아봤으니까는 어머니 아버지를 몬만내(못 만나)보고. 형님이 결혼해가지고 헹수(형수)도 있고 조카들이 있지마는 아무 연락이 없다보니까 몬 만내보고 그랬는데. 70년도 여기 와가지고 한 10년 정도 있다가 소록도 살다가, 살면서는 저가 집에 편지를 한통 보냈어예. 편지를 한통 보내면서는 ‘나도 우리 김해 김가. 우리 집에 나도 자손이다. 아무리 내가 한센씨벵이(병이) 들었지마는 어떻게 고향을 등지고, 이제 소식조차 단절하고 살아갈 수가 있나?’ 그래서 인자 그 편지를 보냈든마는 그때에 답장이 온 것이 ‘아버지가 지금 벵으로 위급하니까는 오라.’ 고 편지 답장이 왔습디다. 왔는데 저가 인자 눈 어둡단 말을 안 했으니까네 집에서는 아버지가 지금 벵으로 위급하니까는 오라 그러지마는 갈 수도 없고. 제가 인제 몬간다고 그라고. 인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연락도 왔습디다. 또 인자 연락도 왔습니다. 제가 참석을 못했고. 어머니 돌아가실 때는 제가 몰랐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는 제가 편지를 보내가지고 그거를 알게 됐는데. 지금 이제 지금 집에는 지금 헹수하고 조카들하고만 살고 있지. 헹님도 돌아가시고 없고 아버지 어머니도 없습니다. (조사자 : 그러면 형님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이라도 얼굴을 뵈었어요?) 헹님은 저저 연락해가지고 여기 한번 큰… 그때 조카딸이 어린 8살 먹은 조카딸인데, 그 우(위)로 큰 남 조카들 둘이가 있고, 밑으로 여 조카 둘이가 있는데, 8살 먹은 조카딸이 헹님하고 같이 여기 왔어예. 와가지고 하룻밤 자고. 또 이제 볼일도 있고, 그래가지고 이틀 밤 자고 간 일이 있습니다. 형님은 두 번 왔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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