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589_MONA_20170511_KKR_HSO_005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금갑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 :
    2017. 5. 11
    제보자 :
    황석옥(남, 87세, 1931년생)
    조사자 :
    김명선, 윤홍기
    구현상황
    제보자는 의신면 금갑리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에서 교련과 한문을 가르치다 퇴임 후 현재 진도문화원 콘텐츠반에서 활동 하고 있다. 고령임에도 기억력이 좋아 금갑리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과 유적을 역사적 사건과 연결해서 구술해주었다. 제보자 는 손(孫)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중학교 6학년(20세)에 결혼을 했는데, 그 다음해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당시의 상황에 관한 경험담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줄거리
    1・4후퇴 당시 서울을 빼앗기고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자 나라에서는 남쪽 병력 자원을 빼앗길까 두려워 청년들을 부산으로 집결시켰는데, 제보자를 비롯해 2명의 학생들이 징집에서 제외되었다. 마을에 남은 그들은 해안, 주간 경비 책임을 맡고 여자들에게 제 식 훈련을 시켰다는 이야기이다.
    내용

    6・25가 나가지고 제1차 후퇴 당시에, 낙동강 방어 전선에서 최후로 막아낸 그때까지 청년들을 국가에서 제대로 관리를 못했어. 그래서 병력 자원 확보를 못해가지고 젊은 사람들을 모두 의용군으로 해서 인민군들이 많이 채가버렸어.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가지고 1・4후퇴인 1951년 1월 4일 제2차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할 당시에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자, 남쪽에서는 병력 자원을 혹시라도 빼앗길까 두려워 청년들을 전부 다 한군데다가 집결시키기 위해서 차례차례로 부산으로 옮겨가게 했어.
    그때 진도에는 청년들이 몇 천 명이 있었는가 그것은 모르겠으나, 나도 그날 이부자리, 밥그릇, 식량 3일분 가지고 의신초등학교로 모이라 했어. 그땐 집에서 일꾼들이 농사를 지었으니까, 일꾼들이 짐을 짊어지고 의신초등학교 교정에 모였제.
    차례로 쭉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을 안 불러. 그래서 의신 지서장한테 물어보니까,
    “안 불렀으면 됐다.”

    그러게만 이야기했어. 그러면서,
    “이름 안 불렀으면 가도 된다.”
    고 하길래, 일꾼한테 다시 짐을 짊어지게 하고 집으로 왔다. 그때 마침 달밤이었어. 나머지 청년들은 거기서 해가지고 진도 읍내로 이동해서 벽파진으로 해서 나루 건너서 해남까지 갔다고 하나, 나는 안 갔기 때문에 그 내용은 잘 모르겠어.
    여기 남아 있는 사람은,
    ‘남아 있는 지역에 대한 치안을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에 동원되지 않았던 우리 마을에서 학생 세니(셋)가 나하고 목포사범학교 6학년 학생 하나하고, 문태중학교 야간부로 다녔다고 생각되는 세 사람이 동네에 남았었어.
    나와 목포사범학교 학생 둘이가 금갑출장소 관할인 임회면 죽림리에 가가지고 죽림, 강계, 탑립까지 해안 경비, 주간 경비 책임을 지고, 다음은 여자들 제식 훈련을 시켰어.
    낮에는 결혼은 했어도 아직 아이가 없는 여자들과 16세 이상이던가 15세 이상이던가 여자들은 그렇게 해가지고.
    그때 끌려갔던 남자들의 나이는 기억이 안 나나, 남아 있는 45세 이상 남자들은 밤에 근무를 시켰어. 해안초소 근무를 시켰제. 언제 해안 초소로 해가지고 불순세력이 상륙해 오거나 인민군이 상륙해 올 줄 모른다 해가지고, 야간 경비는 남자 노인들을 시키고, 이 사람들은 낮에는 일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낮에는 여자들이 해안 경비 보초를 담당했어.
    그것을 감독하기 위해서 나와 목포사범학교 학생 둘이가 죽림에 파견되어가지고 순찰하고, 시간 나면 제식 훈련도 시켰어. 지금 80세 이상 된 해안가 여성분들은 그런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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