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06_02_MPN_20160818_JIS_0012
    조사장소 :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신생마을 장인심 자택
    조사일 :
    2016-08-18
    제보자 :
    장인심(여, 80세, 1937년생)
    조사자 :
    이옥희, 신은정
    줄거리
    일제시대 때 4대 원장은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돈 없는 원생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 원장의 동상을 세웠던 공원을 볼 때 뼈아픈 고생을 했다는 것을 기억하며 봐야 한다고 하는데, 노역을 하다가 바위에 걸려 넘어지면 기합을 받으며 고생했기 때문에 ‘바위 하나, 하나에 피눈물 나는 바위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내용
    이런 소록도지마는 우리는 배고파도 그라고 살고. 조창원 원장 2대 원장은 소록도 신앙의 자유를 줘서 지금 쩌짝에 가믄은 자혜로운 첫째 병원이 있습니다. 거기 비석이 있고, 비석을 돈 없고 가난할 때, 그 사람 원장은 죽고 나서, 너무나 좋은 원장이라고 비를 세워줬어. (조사자 : 어떤 원장이요?) 하나이 원장, 화전 원장이라고. 하나이 원장. 화전 원장. 화전 원장이라고 있었어. 이따 거 가보세요. 거 가보고. 그 원장은 그렇게 했고. 근디 4대 원장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가. (조사자 : 4대 원장이 누구예요?) 4대 원장은 수호 원장이에요. 수호 원장. 이따 공원에 가서 사진 찍으세요. 공원에, 욱에 공원에 올라가믄. 계단에 올라가믄 캠프단 천사가 이라고 있는, 그 짝으로 올라가믄은 거가 보리피리가 밤새 보리피리가 새겨지고, 그 사람 동상 세웠던 자리가 개원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그러고 그 사람 동상 사진이 요짝에 올라가믄 오른쪽에 있습니다. 간디 동상, 꼭 김일성맨이로(처럼) 그렇게 동상을 해놨는데요. 내가 56년도에 오니까, 동상 탁 엎어놨드라고. 봤어요. 가믄 얼마나 크게 해서, 그 돈이 어떻게 생겼냐 그라믄. 새파란, 아조 최고의 좋은 차돌, 그런 차돌…. (조사자 : 여기 환자들이 너무나 그분의 원망이 커서, 그냥 쓰러뜨려버린 거예요?) 아니제. 해방되고 일본시대 때 못된 원장이니까. 그 원장이 얼마나 못됐느냐 그라믄. 돈도 없는데 일제시대 때 우리 원생들에게 돈을 거출하고, 식량을 깎아내려갖고, 자기 동상을 세워. 자기 동상을 세워놓고, 한 달에 한 번씩 그 동상 앞에 나와서, 한 달에 한 번씩 공원에 우리 원생들 전부 나와서 절하라는 거예요. 그라믄 자기는 그 보리피리, 보리피리 새겨진 것은 내가 보니까 반들반들한 그냥 돌이었어요. 가믄 그 맨들맨들한 거 왜 그렇게 해놨는가. 그 동상 맨들맨들한 돌 앞에 자기네 그 뒤 이따 가보쇼. 개원 기념비가 그 욱에(위에) 있는데, 그 동상 자리, 동상 앞에 자기는 서서 탁 이거 [허리에 손을 얹고] 그거를 받을라고. 그렇게 만들어놨어. 내가 오니까 그래졌는데. 저 보리피리는 61년도에 조창원 원장이 와서 새겨논 거라. 새겨놓고, 저거 그거 해진 반석이라고. 그래 저 반석은 저 옆 동네 다른 섬에 가서 보니까, 고인돌로 있는 걸 가져왔답니다. 일제시대 때. 아 그랬다는 거. 저보다 더 컸는데, 그때 봤던 사람이 그러는데 “좀 뿔러져나갔다.” 그라고, “더, 더 높았는데 자꾸 땅으로 밑으로 내려간다.” 그라고. 그래서 그전에 처음에 세왔을 때 한번 올라가면, 이렇게 기어서 올라갔다는 거예요. 지금 기양 올라가도 돼요. 그 정도로 땅으로 내려가버렸어. 그런 수호원장은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가. 우리 원생들에게 백돌(벽돌)을 굽게 하고, 가마니 짜라 그라고. 그라믄 백돌을 굽는데 어떻게 하냐. 이 적돌 이따 공원에 가믄 빨간 벽돌집, 그런 것들이 그때 다 찍은 거이고. 수 억 만 장을 찍어서, 그 집 지은 거는 얼마 안 된 거예요. 일본으로 수출했단 말예요. 일본으로 가져갔어요 맨날맨날. 그라고 가마니 짜라, 그라고. 가마니도 “한나 앞에 맻 장 짜라.” 백돌도 한 번에 만장씩 나와. 글믄 만장씩 나온 것을 전부다 맨날맨날 새복 4시에 나와서 흙 여날르라 하고. 밥 먹고는 그걸 이개서(물을 부어 반죽하다) 벽돌 만들고. 오후에는 그것 만장 나온 것을 다 해가지고, 한나 앞에 맻 장씩 운반하라 그랬어. 가믄 원생 전체에게 한나 앞에 맻 장씩 운반하는데, 한 호에 맻 맹(몇 명)이 살잖아요? 맻 맹이 사는데, 한 다섯 명 아까 여덟 명, 아홉 명 살잖아요. 여덟 명 중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아픈 사람이 있다여. 가믄 그 배당 아픈 사람 꺼 안 해야 되는데, 아픈 사람까지 해논단 말이에요. 그라믄 아픈 사람 것을 안 아픈 사람이 다 해줬는데 해주면은, ‘내 목아치 대신 했다.’ 해가지고 식량 받으믄은 그 삯으로 줬다 그 말이에요. 그라믄은 아픈 사람은 밥도 못 먹고, 뭐 식량도 더 적지 않았겠어요? 그렇게 하고. 어떤 할머니가 그라드라고. 백돌을 그렇게 새벽같이 4시에 불러내서 가서 일을 하고 오믄은 낮에 점심, 어떤 할머니가 그래 점심 못 먹고 너무 돼서(힘들어서). “아고, 아고! 배 아퍼라!” 그라고 웃목으로 한번, 아랫목으로 한번 궁글고 나믄. 또 호루라기 분다는 거예요. 일하러 나오라고. 그라믄 또 강제로 나가서 일하고. 근데, 어뜬 할머니는 “가서 내가 저녁에 들어가서, 밥만 많이 먹을 희망만 있으믄은 일은 참고 하겠는데, 가봤자 밥 한 숟꾸락 먹을 생각하믄은 힘이 (안) 나드라.” 는 거 아니에요. 그거 할머니 살아서 나한테 얘기하믄서 얼마 전에 돌아가셌어. 저 공원은 깊은 땅이었답니다. 깊은 땅인데 그 욱에는 산이었어요. 산을 전부 솎아다가 지게로 져다가 부서갖고(부어서) 흙을 채와서 나무를 심은 거예요. 그라고 욱에(위) 공원에 가보믄 바위가 막, 자연처럼 했잖아요. 그건 원래 산인데, 그렇게 바위를 많이 자연처럼 심었는데 그렇게 강제 노동을 시켜서. 그거 했다고 했던 사람이 그라믄서, “공원 보믄은 그냥 보지 말고, 그때 그 뼈아픈 고생을 했다는 걸 기억하면서 봐라.” 그라드라고. 그 담에 그럼, 또 어떻게 했냐. 그래갖고 나처럼 힘없는 사람이 발을 맞차서 이렇게 가다가 발을 탁 걸려 넘어지거나 주저앉으믄, 꾀부린다 해가지고 막 채찍으로. 일본사람이 뚜드러 패서, 저 높은 디다가 기합을 주는데. 깨를 벳게서 찬물 찌끄리고(끼얹고), 막 기합을 줬다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희생 당했다잖아요. 그래서 기랑께 ‘그냥 보지 마라’ 드라고. “바위 한나, 한나에 피눈물 나는 바위다.” 그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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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_02_13_MPN_20160818_JIS_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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