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장소 :
    목포시 만호동
    줄거리
    내용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이며 진의 우두머리인 만호(萬戶)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만호진·만호청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리상으로 볼 때 목포는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으며 바다로 연결되는 지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며 호남과 경상남부지역으로 통하는 세곡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목포진이 설치되게 되는 배경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안현(務安縣) 목포(木浦)와 보성현(寶城縣) 여도(呂島) 등은 모두 왜적이 드나드는 요해지(要害地)이온데, 병선(兵船)을 정박하여 세운 곳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청하옵건대, 목포와 여도에 따로 병선을 설치하고 만호(萬戶)를 임명하여 보내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21/04/15(임진) 또한 실록에 따르면 목포진성이 1501년 축성되었으며, 『목포진지』에는 만호(萬戶, 무관 종6품) 1인 외에 군관(軍官) 6인, 진무(鎭撫) 7인, 사부(射夫) 2인, 사령(使令) 5인의 관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만호는 인근 지역의 해상 경계 경비 등 병사업무의 수행 이외에 진영 소재지 인근 마을의 일반 행정까지도 관할하였다. 한반도 서남해 방어지로서 그 역할을 다했던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 군사제도의 개편요구에 따라 목포개항 2년전인 1895년 7월 16일 칙령 제141호로 폐진되었다. 이충무공 난중일기에도 등장하며, 목포진 역사공원 조성사업으로 현재 성곽과 객사가 복원되었다. 객사 내에 만호 방대령 선정비(1715)와 수군절도사 신광익 선정비(1763)가 있는데, 이 2기의 비석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당시 목포시청(현 근대역사관1관 뒤뜰에 묻혀있었던 것을 1950년 건물 중수 때 발견되어 건물 입구에 세웠다가 목포진 복원 후 현 위치에 옮겨 세운 것이다. 목포진은 1894년 동학농민군에게 습격당해 무기를 탈취당하였다. 1897년 개항후 일본 영사가 이 목포진 건물을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저작권
    상업적 사용 금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은 로그인 후 사용이 가능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