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1-10_09_FOT_20160713_CSE_LHS_0004
    조사장소 :
    보성군 조성면 귀산길 61
    조사일 :
    2016. 7. 13 (수)
    제보자 :
    임형석, 73, 남, 고졸, 토박이
    조사자 :
    최성은
    구현상황
    삼도 임계영장군현창위원회 이사장으로 계시는 임형석 님을 자택에서 만나 선조되신 임계영 의병장 이야기를 들었다. 청중으로 화순 이양 작은 사찰에 있는 스님이 동석했고 임형석님 부인께서 음식을 준비하는 중에 함께 했다. 선풍기가 소음으로 들린다.
    줄거리
    경상북도 나라얼연구소에서 3백년전에 축내 살던 임제당의 시집을 인터넷 헌책방에서 구입해 번역을 해보니 시 일백여편이 실려 있었다. 임제당이 부인이 죽자 부인을 그리워 하면서 쓴 시였던 것이다. 삼도 임계영 장군 현창사업이 8년전부터 시작되어 1차 공사가 끝나고 현재 2차 공사가 진행중인데 임형석님이 부지를 마련한 때가 64세였고 임계영 장군이 전라좌의병장으로 출전할 때가 64세였다. 6대 종가 옆에 살면서 자신은 양옥집에 살면서 종택이 초라하면 안된다고 생각해 전통 한옥으로 종택을 건립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내용
    자세히는 모르는데. 자세히는 모르는데. 작년에 경상도에서 누가 왔어. 그래가지고는 나라얼 연구소라고 황점례인가 거 이사장인가 되고. 누구 연구소장이 되고. 또 조 누군가 거이 이사장이 된 분이 여기를 왔더라고. 그래서 한번 만나자고. 그래 왜 그래야 그런께는 축내에서 이렇게 사시다가 금정으로 금정 쩌그를 보고 금정산이라고 그러거든. 금정산. 쩌가 옛날에 금이 나왔다고 해서 금정산이라고 그런거 같어. 거 인자 거 거시기. 그런 얘기를 쭉 헌디 이거 어쯔게 해갔고 여기를 왔냐 그런께는 이 사람이 저 고서적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 거이드만. 옛날의 상거나 이런 문화를 연구하는 경상도의 나라얼 연구소라는 것이 인자 국가에서 그렇게 인자 거시기를 해줘. 다 인자 상거나 이런거 없어져 불어졌잖애. 거기는 그것만 유득히나 그걸 다시 또 요렇게 부각을 시키더라고. 그래가지고 이 고서를 어디서 가져 왔느냐고 그러께는 뭐 인터넷에 본께는 거 있더라고 그러면서 이 제목을 보고 자기가 탄복을 했다. 나 죽어 당신 만나면 이 슬픔 그치겠지요 하는 제목이 그거여. 근께 아 지금으로부터 삼백년전에 아 남존여비 세상 아니요. 근데 어떻게 자기 부인을 그리는 제목 자체가 희귀해. 그런께인자 이것을 거시기를 몇 달을 번역을 해 본께는 그렇게 일반 문학 작품일라지 요런 것은 꾸밈이 있는디. 이것은 순수하니 보면 본데로 생각나면 생각난데로 그대로해서 해갔고 백편의 시를 썼다 그거여. 글고 자기 돌아간 다음에 자기 형이 두 편의 시를 써갔고 마무리 했다고 그 얘기를 해. 그래서인자 작년에 총회에서 만나갔고는 아 이것은 임씨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부각을 시켜야 할 것 아니냐고 그래금서 책자로 만들면은 어쯔겠냐고 그래. 그래서 아 우리도 얼마 주고 주고 그러 해갔고 실은 책을 만들어서 금년에 보성에 오면 봇재다원 효원이란 거그서 출판 기념식도 한번 하고 사람들은 모였어. 자기들도 그걸 보고는 느껴. 그래서 인자 금년 가을에 겨울에나 이것은 여기서 할 일이 아니라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서울에서 서울에서 각 거 사학연구원 교수들을 초빙을 해 가지고 그렇게 해야 쓰겠다 해서 인자 상당히 경비도 지출이 되야. 근디 마치 우리인자 문임에 학계에서 인자 그런 그 연구하는 교수들이 몇 분 있는 거이드만 근께 자기들이 서울에서 주최를 하겄다해서 인자 그래서 발표를 할라 그래요. 그것은. 아까 임진왜란때 보면은 의병 총칼을 추켜들고 이렇게 왜놈을 무찔렀다는 그것은 나도 인자 저기를 그 당시 삼도공 할아버지의 연세가 64세여. 글면 옛날 지금으로부터 임진왜란이면 사오백년전에 64세이면 극노인이여. 우리 저 집 뒤에 가면 자네도 알 고름장굴이 있네. 그때는 60살 먹으면 오강하고 저 놔두고는 문 잠가부러. 그러면 죽으라하고. 64세면 극노인중에서도 극노인이라. 그리고 왕가의 수명이 54세밖에 안돼야. 그런디 64세에 어떻게 천명의 의병을 이끌고 거기서도 좌의병장을 추대받아서 화순의 최경회는 우의병장이여. 여기는 좌의병장. 그런디 그렇게 훌륭한 할아버지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이 이렇게 미약하고 해서 사당 한나 건립을 못하고 있던 차에 2008년도 마침 그래도 상원이 부군수가 여기 재직시에 뭐 있는 것 없는 것 예산 뽑아나서 지금 한 15억 정도 들어가서 1차 사업하고 이번에 또 마침 군수님이 또 사업 줘서 지금 동재 서재 짓고 있는디 참 부끄럽제 부끄러와 우리가 생각하면은. 그래도 나도 저거 부지를 마련함에 있어서는 내 나이가 그때가 64세여. 나도 즈그 자리를 못하고 헤매이고 있는디 꿈에 선몽을 해. 아이놈아 뭣하고 있냐 지금. 그것이 묘하게 글드라고 그래서 딱 거기 가서 앞에 본께는 아이 앞이 봉두산이 보이고 참 그 전경이 좋아. 봉두산이 보이고. 자네 전번에 안 봤는가. 그래서 아 바로 여기다 해서인자 거기다가 자리를 잡고 한 것이 8년이란 세월이 흘렀소만은 시작이 반이라고. 잘 되어가고 있고. 또 여기는 내가 부끄럽지만은 우리가 6대가 내려온 종가댁이요. 이 친구도 인자 잘 알지만은 여기가 서당도 있었고 참 옛날에 6대가 내려 왔다면 옛날에 한 대가 3대를 못간다고 그러거든 놀음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재산도 3대를 못간다고 한디 그래 6대째 내려왔소. 내가 인자 7대째요. 나는 인자 큰집이 아니여. 큰집이 아니고 작은집인디 그래도 내가 곁에 살고 있으면서 나는 양옥으로 살고 있는디 종가댁이 저렇게 추태백이로 있으면 쓰겄소. 그래 뜯고 지금 한 20평을 한 3억 지금 예산 들여서 지금 한옥에 오리지날 한옥으로 지금 공사를 지금 하고 있는 처지요. 지금. 근께 우리 선조 분들이 한때는 총칼을 치끌고 가서 왜놈을 무찌른 그런 할아버지가 계신가 하면은 또 한쪽은 선비의 정신을 가지고 이렇게 자기 부인을 사모하는 그런 할아버지가 계셨다는 것이 참 보기에는 후손으로서 참 부끄럽지만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러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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