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1-10_01_FOT_20161002_KHH_CYG_0001
    조사장소 :
    보성군 보성읍 쾌상리 보향다원(차체험장에서)
    조사일 :
    2016-10-02(오후 1시 20분)
    제보자 :
    최영기(나이:61/남/토박이)
    조사자 :
    김현호
    구현상황
    약속한 날 보향다원에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아 차 체험장으로 안내했다. 체험장 안엔 차 덖는 가마솥 다섯 개가 황토를 바른 화덕에 걸려있다. 벽면엔 차를 만드는 과정을 그린 한국화 그림 여러 장이 붙어있고 그 위로 전차꾸러미가 즐비하게 걸려 있다. 체험장 입구엔 여러 종류의 차 제품이 진열되어 있고 차탁이 놓여 있다. 구술자의 등 뒤 벽에 대통령 표창장이 걸려 있다. 보향다원 최영기 대표가 농촌 융복합산업육성을 통하여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15년에 받은 것이다. 생활한복을 입은 최영기 씨가 차에 관한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들려주었다. 안주인은 향기로운 차를 우려 주었다.
    줄거리
    5대째 차 농사를 짓고 있는 차 농가로써 보향다원 최영기 대표의 할아버지는 이리농림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할아버지는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보성농고(현 다향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최영기 대표 또한 보성 농고를 나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일구기 시작한 차밭에서 아들과 더불어 차 농사를 지으며 보성 차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1938년 경성화학이 대한다원을 조성하게 되는데 보성에서 제일가는 갑부요, 할아버지의 처남인 김영학(6·25 때 납북) 씨가 실질적인 경영주였다. 당시 대한다원에서 찻잎을 가져다 보성읍에 있는 엽연초생산조합 오차 공장에서 차를 만들어 서울 등지에 내다 팔았다. 보향다원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금차는 현재 신라호텔 등에 납품하여 호평을 받고 있고 유럽과 미국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등 보성 차의 역사를 써가고 있다.
    내용
    아시다시피 저는 보성농고를 졸업했고 아버님은 광주 농업학교를 졸업하셨어요. 그 조부님은 이리농림을 이케 졸업하셨는데, 어 일본 이리 그때는 그러니깐 어떤 공업계 고등학교나 상업계 고등학교가 없고 일제하에서는 농업계 고등학교가 주로 많이 있었죠.(예 지금 익산이요?) 예 그렇죠. 예. 근데 어 수원농림학교가 지금 서울농대 전신이고 에 제가 알기로는 이리농림학교가 아마 전북대 전신이고 광주농업학교가 전남농대 전신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근데 이제 나중에 거기가 발전 되가지고 이렇게 근데 그때에 이리농림학교가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근데 인제 조부님이 이리농림을 인제 요즘으로 말하면은 어 중.고등학교 그런 과정이었으니까 근데 6학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때 옛날에는 인자 소학교라 그랬죠. 6학년 때 졸업하고도 이리농림학교를 들어가는 것이 에 그전에 서중학교 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힘들었는데 아 할아버지가 아주 그 그렇게 수재셨던 모양이에요. 그래가지고 5학년 때 에 5학년 때 이리농림을 에 들어가셨다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그 그때 당시에 경찰서장하고 군수가 에 찾아와서 그 축하를 해줄 정도로 그 아주 크게 그 그렇게 경사가 났다고 그 그렇게 하셨는데. 이분이 이리농림을 다니시면서 인제 일본사람들한테 안질려고 에 일본인들한테 안질려고 어 5학년 때 들어갔으니까 인제 뭐 키도 작았을 것이고 옛날 그 저 또 객지고 에 그니깐 이리까지 가서 인제 주로 다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거기까지 가셔서 공부를 하는데 그 일본인들한테 안질려고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에 하셨대요. 그래가지고 이리농림을 수석으로 졸업을 하셨어요. 에 그래서 그 인제 저희들한테 그게 그 저 저희 아버님 형제가 5남 3년데 이분들한테 또 조부님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 뭐해라 그런 이야기를 안하시는데 이 아버님 형제분들이 인제 이렇게 조부님이 그렇게 공부를 그렇게 하셨으니까 아버님 형제분들도 인제 아버님이 저희 아버지가 인제 광주농업학교를 나오시고 그 바로 밑에 숙부님이 에 인제 전남농대를 가셨는데 전남농대를 인자 수석으로 졸업하셨다 그래요. 인제 위에서 열심히 하시니까 또 이렇게 에 그렇게 하셨는데. 그 조부님의 처남 에 조부님의 처남이 김영 자 학자 광산김씨 에 김영학 씨라고 그러는데 지금 저 선씨 제각. 에 저 (오충사?) 오충사 바로 곁에가 그 김영학씨 그러니깐 우리 할머니 친정이 거기가 있었어요. 근데 저 몇 년 전에 안타깝게 한 한 7~8년 전이나 되나 한 10년 전이나 되나 오충사 바로 곁에 별채가 있었는데 그 별채도 없어졌어요. 그 오충사 우측에서부터 쭉 내려 가면은 그 목욕탕 골목이 있어요. 그 거기 일대가 다 할머니 친정집이었어요. 에 근데 거기에 인제 할아버지 저 처남이 김영 자 학자 김영학씨라고 근데 할머니 친정이 그 굉장히 잘 살아셨던 모양이에요. 그 보성서 제일가는 부자라고. 광산김씨 에 저 듣기로는 뭐 화순 박팔만이 보성 김영학이 뭐 이렇게 몇 사람이 저거한데 보성서 제일가는 그런 어 부자셨는데 그 김영학씨가 일찍 신학문에 눈을 떠가지고 그 일제 강점기 때 그 와세다 대학을 졸업을 하셨대요. 그니까 그 식민지하에서 지식인들이 할 것이 없잖아요. 뭐 일제하에 공직에 있던가 글안하믄 자기 사업을 하든가 글안하믄 어디로 도망가든가 인제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 서 서민호 씨라고 초대 민선 도지사가 계세요. 에 이분하고 와세다 거 대학 동기라고 에 그러시더라고요. 근데 그 얘기 지금 왜 이 이야기가 이렇게 서두가 길어졌냐면은 경성화학이라 아시죠. 에 경성화학이 우리 대한다원을 1938년도에 대한다원을 조성을 했죠. 근데 그 경성화학에 그 실질적인 오너가 김영학씨였어. 에 그 바깥에 사장은 껍데기 그 사장은 일본사람이고 그니까 일본인 견 경성화학이 지어졌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 실질적인 인제 김영학씨가 보성서 제일 워낙 큰 부자고 그러고 일본에서 와세다 대학을 다니고 그러면서 이 이제 우리 국내에서 뭔 그때 당시에 사업을 할 만한 게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그 이제 일본인 게 회사에 대주주랄까 에 이제 실질적인 오너 에 그래서 그 이제 거기다가 투자를 그렇게 하셔가지고 차밭을 대한다원 일대에다가 조성을 하셨는데 대한다원 거기가 차 공장이 없었어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대한다원 거기서 대한다원 거기서 차를 만들어가지고 거기서 차를 거 차를 재배하고 거기서 만들어가지고 이렇게 오는 것을 우리는 알죠 . 근데 그게 아니라 (저 어렸을 때 보면은 거기서 만들던데 그 전 이야길까요?) 그렇죠. 그 전 이야기죠. 한참 전에. 그니까 거기는 인제 아시겠지만 자갈길에다가 뭐 째깐한 소로로 해 가꼬 도락구나 그리 지나다니고 그라는데 그 일대가 아주 산에다가 굉장히 그 찝찝하고 굉장히 거 울창했던 모양이에요. 그 차밭 조성한데 그 언더리 위에는. 근데 거기서 차를 가지고 와가지고 여기 엽연초생산조합. 에 그니까 엽연초생산조합이 지금도 제가 알기로는 아마 특정인 것이 아니라 엽연초생산공장 것으로 돼있을 것 엽연초생산조합 것으로 돼있을 거에요. 거기가 오차공장이라고 차를 일본식으로 높임말이 오차라고 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 오차공장이 엽연초생산조합 거기였었는데 그 엽연초생산조합 뒤쪽에가 산이 있었어요. 지금 그것이 어디까? 한전 바로 맞은편이니깐 뭔 공업사 있고 뭐이고 그런 쩌기꺼야 우리 애랬을 때도 거기가 상당히 꽤 높은 산 이였었거든요. 근데 그 산을 다 인제 그 인제 흙을 내다가 인제 해서 거기가 거의 평탄화 되버렸는데 그 엽연초 생산공장 옆에가 차 가공 공장이 있었어요. 그래가꼬 거기를 보고 사람들이 저 어렸을 때도 거기가 저 거기를 보고 전부다 다 오차공장 엽연초생산조합 훨씬 더 그 전에 인제 오차공장이라고 거기가 오차공장이라고 그러고 보성에가 대한다원에가 공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다원은 차밭이 있고 그걸 가공은 여기서 오차공장에서 이렇게 했었죠. 나이를 한 지금 한 70대 80대 이 주봉리나 이 언더리에 사는 사람들은 그걸 전부다 알아요. 옛날에 거기를 다 여변체 생산조합 그 전에 오차공장이라고 우리 어렸을 때는 거기가 오차공장이라고 그랬거든요. (그 지금의 정확한 위치는 그럼 읍사무소 건너편에?) 엽연초 아니아니 여기여기 요 지금 오일시장 백악관 모텔있죠? 백악관 모텔 그 골목으로 쪼끔 더 가시면 엽연초생산조합이 있어요. 백악관 모텔 그 바로 그 뒤쪽이니까. 한 50m나 100m나 될까? 그 왼 왼족에 여 붉은 기와 벽돌로 해가꼬 엽연초생산조합이라고 그렇게 했는데 그 전에는 인자 저 담배 잎을 수매를 많이 하고 그럴때는 거기가 꽤 그래도 꽤 활성화 되고 거기도 좀 쩌거 했었는데 지금은 안하니까 그 건물만 요로고 밖에 간판에다가 인제 누가 사용을 한가 어쩐가 몰라도 근디 거기가 그전에는 꽤 컸어요. 안에가. 그래가꼬 거기가 그 오차공자이 그 위치에요. 그래가꼬 인제 해방이 45년도에 해방이 되니까... 차 드셔요. [찻잔에 차를 따라 주며] <청중. 그러니까 결론은 할아버지 할머니 오빠 분이 인제 김영학씨 그분이 그 실제로 그걸 운영하던 분이다 그 말씀이잖아요?) 예. 예. 그래. 인제 38년도에 조성을 하고 인자 한 5~6년 되아야 차를 생산하니까 그걸 주로 에 차를 만들면은 에 서울갔다가 파셨던 모양이드만. 서울 갔다 파셨는데 그 포장지를 오차공장은 쩌기가 있는데 거기다가 다 쟁여놓지 않고 그 포장지를 여기 우리집 여기 방하고 창고에다가 그 이케 포장지를 저 쩌걸 하셨는데 조부님이 그걸 가끔씩 오차공장에다가 인제 요 그 그게 포장지를 보관을 잘해야 돼서 그랬는지 글안하면은 그 이유는 잘 모르는데 상당히 여기다가 포장지를 갖다가놓고 가끔씩 인제 그거는 저희 우리 숙부님 이야기에요. 숙부님이 어릴 때 보시기에 그렇게 그 포장지를 한번씩 인제 거기 오차공장에다 갖다가 주고 그러셨던 모양이에요. 그래가꼬 이제 38년도에 조성을 하고 이제 한 4~5년 되면 되니까 생산을 해가꼬 막 그 이렇게 좀 1~2, 2~3년 동안 팔 그럴 무렵이 이제 해방이 된거에요. 근데 주 차를 어디다가 서울다가 에 서울에서 소비를 하고 그러는데 해방이 되고도 에 한 3년 동안은 저 오차공장을 가동을 했대요. 에 오차공장을 가동을 하고 거기서 생산을 해가지고 인제 서울로 차를 갖고가고 그랬는데 그 근데 문제는 해방이 되고 대부분 주 소비층이 일본의 쪼끔 그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일본의 그때만 해도 그래도 에 이케 인제 일본 그 어떤 뭐 관료들이랄지 좀 사람들이 주로 차를 소비하죠. 일본인 중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이 차를 마시기는 어려웠겠죠. 그래가지고 에 해방이 되면서 또 한 2~3년 동안 더 정확하게는 이 47년인가 48년인가는 모르는데 그거를 차를 그때는 계속 만들어가지고 그케 서울로 그케 보냈었대요. 그러니까 가동을 그렇게 했었대요. 근데 48년도에 차가 더 나가질 않으니까 인제 해 해방 정국이 굉장히 소용돌이 치고 시끄럽고 또 거기다가 주 소비층인 일본인들이 인제 다 빠져 나가버리고 그니까 차는 인제 인제 여기가 오차공장에서 쩌기 만들던 그런 쩌기는 있고 또 포장지도 있고 그러니까 만드는데 소비가 안되니까 48년도에 문을 닫았대요. 그래가꼬 이분이 그러니까 김영학씨가 여기에가 그 오충사 거기 거 바로 옆에 그 일대가 이렇게 되 이분 댁이었는데 6.25때 소실되고 별채만 남았었어요. 김영학씨가 외아들이고 또 김영학씨 아들이 또 외아들이에요. 근데 6.25가 발발하니까 둘다 그 부르주아 지주라고 그래가지고 둘다 납북되버렸어요. 그래가지고 그러니까 할머니하고 언니가 한 분 계시고 거기 오빠고 그 김영학씨가 인제 오빤데 그래가지고 1남 2년가 되는데 인제 광산김씨 인제 제사도 거기서 다 모셨거든요. 그 인제 워낙 잘살고 그니까 그 인제 일종의 큰집이였는가 어쨌는가 인제 이렇게 하다가 제가 아주 거 어렸을 때 그분들은 안계시지만은 그 김영학씨 인제 부인 우리 할머니로서 올케 그분이 그 계속 제사를 인제 모시고 또 그 올케가 데리고 왔던 동복 오씬데 올케가 데리고 왔던 에 노복이 있어요. 그 노복이 저 어렸을 때 중학굔가 초등학굔가 작고를 했는데 그 그니깐 그 올케가 노복하고 같이 이 이제 전답을 관리를 하고 다 어디가 어딨는지도 몰라. 워낙 많으니까. 그래가꼬 인제 이렇게 관리를 하고 그랬었는데 거기 관리인이 ○○○씨라고 이분이 저 바로 뒤쪽에 여기 사셨는데 여기 뒤에 고아원도 그분 거기 그 다 그땅이였어요. 그래가꼬 거기서 사셨는데 ○○○씨가 관리를 하는데 상당히 또 인자 그 수도 받고 또 이분이 또 많이 팔아묵고 인자 중간에서 에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기억나는 것은 인자 제가 초등학교 때 그 오보배씨가 돌아가셨어요. 할머니 올케가. 근데 매일같이 밥을 해서 그 밥 싼거 있잖아요. 이렇게 수 저 손으로 짜가지고 이 밥 두그릇을 매일 밥을 해서 그 아랫목에다 묻어놔. 그니깐 외아들하고 남편이 언제라도 올지 그때 당시에 전기밥솥이 없잖아요. 에 1960년 때 이때는 뭐 지금은 뭐 다 전기밥솥 쓰지만 근디 그때 기억이 이분이 그러니까 6.25가 50년에 나갔고 6.25때 한 6월인가 7월인가 이분들이 납북되아 버렸으니까. 에 60년때 60년 그 저 한 2~3년이라믄 12~3년 밖에 안 경과가 안된 그런 쩌긴데 제가 어렸을때도 거기 심부름을 가거나 할머니가 거기 거기 계셔가지고 그리 오락해서 인제 초등학교 초등학교 마치고 그리 들려서 여기를 오는데 그 좌우지간에 아무리 옆에서 누가 뭐락해도 매일 같이 밥을 해서 그 이 두그릇을 아랫목에 묻어 묻어놔. 에 그 그때는 어떤 그렇게 의미있게 생각을 안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 남편하고 외아들이 에 행방불명 되고 나중에 인제 소문으로 듣길 납북당했다고 인민군들이 끌고갔다고 그러는데 자기 눈으로 안봤으니까 믿지를 못하는거야. 에 그래가꼬 금방이라도 나타날것처럼 이렇게 생각을 이분이 그니까 돌아가실때까지 게 68년인가 67인가 돌아가셨을거야. 근데 돌아가실때까지 좌우지간에 매일같이 밥을 해가지고 이렇게 에 참 정말 그때는 그렇게 깊이 있게 생각 못했는데 정말 한도 그런 한이 없죠. 그래가지고 어 그 광산김씨 에 ○○○씨 ○○○씨 거기가 딱 이렇게 문을 에 닫아버린거죠. 만약에 이분이 그때 납북을 안당하고 그 어떤 살아계셨다면 정말 그 보성차의 맥을 에 정말 잇고 에 제대로 참 정말 발전을 더욱 발전을 시켰을건데 아쉬운 감이 없지 참 많이 있구요. 그리고 인제 조부님이 인제 최 일자 용자 최일용이신데 아까 이리농림을 수석으로 졸업하신 분 인제 이신데 이케 요 해방이 되고 그 오차공장에도 처남 일이니까 쪼끔 인자 관여를 하셨던 것 같애요. 에 그리고 에 그때는 그 인제 집 한쪽에다가 거기서 차를 갖고 와가지고 가공을 해서 그 차를 갖고와서 여기서 인제 드시기도 하고 그래서 집 여기다가 좀 텃밭에다가 쪼끔 심자 그래가꼬 인제 한 100평이나 되았는가 인제 집 한쪽에다가 인제 이케 심으셨는데 이분이 그 보성농고 안태식 교장선생이랑 모다 인제 이 보성농고를 설립하실 때 인자 함께 다 지역 유지라고 같이 인자 쩌거 하셔가꼬 그 농고에서 교편을 잡으셨어요. 그래가꼬 계속 후진들을 양성하고 그러시다가 66년도엔가 작고를 하셨죠. 에 (그때 그 차를 만들때는 대한다원에서 찻잎을 갔다가 이렇게 만드셨어요?) 차 그 오차공장에서 차를 만들고 인제 조부님은 여기다가 포장제를 놔두고 거기다가 인제 자기 처남 일 이니까 에 거기다가 인제 저 그게 (거 찻잎은 옛날에도 차밭이 조성되었어요? 여기가?) 여기는 아니고 한쪽에 집 한쪽에 뒤쪽에 쪼금 여기가 다는 아니고 (평소에 찻잎을 어디서 가지고 와가지고?) 아니 그니까 원래 주 쩌기는 오차공장에서 만들고 대한다원에서 나와가꼬 오차공장에서 만들고 그 차도 갔다가 먹고 그리고 인제 우리가 집 한쪽에다가 에 한 1~200평 인제 이케 쪼끔 그때 있어가꼬 (그때 조성을 하셨구만요?) 예 그때 쪼끔 있어가꼬 인제 조부님이 그때 당시는 지금 같이 녹차로 이렇게 않고 뭐 한 번 덖어가지고 잠깐 먹고 그리고는 주로 뭘로 인제 저거하냐믄은 그 띄운차라고. 에 띄운차라고 그 청국장 띄우듯이 차를 긍께 지금으로 말하자면 (발효차하고 쫌 다릅니까?) 아니요. 긍께 발효차라는 것은 산화차죠. 산화를 시킨거죠. 근데 에 미생물 발효차에요. 이것은. 이거는 산화고 [마시는 찻잔을 가리키며] 그 띄운 차라고 그래가지고 차를 에 이케 그 청국장 띄우듯이 온도에다가 쪼금 더 따뜻하게 해서 이 차가 이케 발효를 미생물 발효를 하도록 만들어요. 그러면은 인제 엄격하게 말하면은 중국 발효차나 보이차나 우리 전차나 그런 거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미생물 발효차 범주에 들어가는데 우리 전차같이 쩌길 하질 않고 그 이케 띄운 차를 쪼끔 만들어서 에 식구들끼리 이케 저 마시고 인제 조부님이 보성농고에서 교편을 잡으시고 인자 아버지가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하셔 가지고 그 보성군청에 에 이렇게 계셨어요. 인제 저도 인자 농고를 에 이케 나왔죠. 그래가꼬 이케 참 잘 해 이케 윗대에서 그니깐 이 전 군수님 정종해 이 이분도 저 조부님 제자시고 모다 그 후진들을 많이 이케 에 양성을 이렇게 이렇게 오랫동안 하셔가지고 에 그 인제 아버님이 장남인데 그 밑에 최 희자 도자 저 그 분도 광주농고에서 오랫동안 계시다가 그 인제 화정여중 교장 선생으로 나가시고 에 그 아래 저 아래쪽 최 희자 영자 그분도 인제 조선대학교에 계셨고 그 또 아래 인제 최 국자 인자 그 숙부님은 인제 목포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하셨고 인자 다섯째 숙부님도 최 희자 명자 인제 이분 희명 숙부님도 인제 순천고 쪽에 정년하시고 전부다 인제 교육계로 그라고 저는 인제 이 윗대에서 여기가 인제 제 터전이고 여기가 제가 여기서 태생이라나서 인제 에 이라고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하 하하. 그래 그 조부님께 했었던 그 띄운차 요거를 이케 할머니가 참 솜씨가 좋으셔요. 이케 그래서 이 할머니가 그 차를 가끔씩 만들어가꼬 인자 주시고 그라는데 이 그 전 그 띄운차가 미생물 발효차로 상당히 에 이케 괜찮고 그래서 근디 문제는 대량생산이 어려워요. 사람 긍께 손이 굉장히 많이 가고 그래서 에 이거를 쪼끔 발전시켜서 에 이케 전번에 일본에서 바이어가 왔을 때 이 차를 내놨더니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쪽 감각하고는 쪼끔 또 다르구요. 그래서 자기들이 만드는대로 에 수입을 좀 해가겠다고. 그래서 에 곧바로 대량생산은 어렵겠지만 좌우지간에 그걸 그케 그러면은 우리가 거기다 대응을 하겠다고. (그러면 조부님 때부터 차를 하셨어요?) 그렇죠. 저희 에 증조부 증조부님하고 조부님하고 여기를 같이 개간하셨어요. (아! 증조부님도. 예 그래서 5대째) 여기가 에 여기가 그 쩌 위에서부터 쩌 읍에 나가기 그게 느티나무 있죠? 거기가 전부 김영학씨 땅이야. 에 근데 요 보니까 저희 조부님이 그렇게 이리농림을 수석으로 졸업하시고 신동이고 그러니까 아마 거 김영학씨 거 이케 처남 손위 처남이지. 인제 이분이 보시기에 그 아주 장래가 촉망되고 또 그 김영학씨 인자 아버님 되시는 분도 에 자기 막내딸을 이케 쩌기하기에 지장이 없다 참 좋겠다. 그래가지고 중간에 사람을 대가지고 인제 조부님하고 인제 쩌걸 하셨는데. 조부님은 조부님하고 증조부님하고 여기를 인제 같이 개간을 하신 것 같애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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