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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매는 진~짜 이 마을에서는 없는 고생을 했지. 그 아까 저기 시아마니. 좌파를 하믄은 타 부락으로 저그, “같이 하자!” 고 댕긴갑디다. 딴 부락에 배우는 사람한테로, 밤에. 낮에는 못 가고, 밤에 가서 그 사람을 “같이 하자!” 그라로 댕기갖고. 인자 말하자먼, 그 할 때 마을에서 여그…
(귀신골은) 그때 (여순) 사건 난 사람들을 전부 다 잡어다 거그서 총살시킨 자리예요. 그러니까 뭐냐믄, 지금 올라가믄은. 옛날에 그 저수지 침수돼불었는디. 이 세멘(시멘트) 거석으로 암벽을 해논 데가 있어요. 그래가지고 거기다 세워가지고는 전부 다 총살시켜분 거여. 거가 구신골 자리라 그래. 그…
피해는 없었는데, 여순사건 때 시방 산 사람도 있습니다만. 우리 학생들 거기 저 여수서 공부한다고 가가지고, 피난도 했고 그랬다가. 나는 여그서 겪었습니다. 여순반란을 겪었는디…. 반란군으로 몰려가지고 얼마나 고통을 젺었든지(겪었든지). 그런 것도 있고. 실은 여수 15연대, 15연대. 군인들 출…
1948년도에 반란이 일어났는데, 우리들은 그때 국민학교도 아직 안 들어가고 철이 없을 땐데, 그 사람들이 우리 동네 분네들도 가담이 됐어요. 14연대가. 박정희 대통령이 14연대 중위였어, 중위. 어르신들 얘기 들어보믄. 중위였는데. 우리 동네 똑똑한 청년들이, “14연대가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직접 체험한 바에 의하면, 여수반란이 내가 열아홉 살, 지금 현재 나가 팔십팔이여. 그란디 열아홉 살 먹어서 여수반란이 났어. 나 열아홉 살 때. 그란디 열아홉 살 때 났는디, 장가를 내가 열아홉 살에 갔어. 결혼할 때에. 그래가지고 그 다음날 왔는디. 여수반란이 나가지고 7월 22일 날 저녁에…
* 앞의 ‘여순사건 때 집으로 쳐들어온 반란군’ 이야기에서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반란군이 산으로 도망간 바로 뒤에 집으로) 제일 먼저 누가 왔는고는, 우리 중산 대부가 왔어. 제일 먼저 뛰어왔어. 우리 집안에 어른인디, 그란디 그 전에 전과가 쪼까 있고. 대밭에 와가지고 (반란)군 놈 만…
(여순사건 당시 경찰이 어느 정도) 진압을 시켜가지고, 마을이 인자 잠정이 됐는데, 한두 명이가 팔영산서 빨치산, 요새 인자 빨치산 안나옵디여? 시방 태영호 빨치산 아들이라 그리 안합디여? 그 빨치산이, 그 대장들이 인자 지리산을 들어갔어. 말하자면. 여순반란 대장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가지고. 들어가…
첨도. 첨도가 우리 마을 속인데, 왜 ‘첨도’라 했냐면은. 반란 사건 때 피난민들이 천 명이 살았어요, 천 명이. 피난민들이 긍께 물이, 물이 없는 것 같아도 천 명이 먹을 수 있는 물이 거그서 나오더라요. 그런 말을 들었어. (청중 : 물이, 사람이 하나 살 때는 한 사람 물도 별로 안 많은디, …
반란(여순사건) 났을 때 그랬지. 우리 저 텃골 살 때. 텃골 살 때. 그때 진짜 좌파데기들, 이 동네가 한 일곱인가, 야닯(여덟)인가 돼갖고. 그때 난리를 당했제, 아죠. 그래갖고 하이튼 인제 막, 소리를 나오먼 이 논빼미로 전부를 가서 엎채서, 전부 엎채서. 우리 시아바지랑 할매들이 텃골,…
뒤로 저쪽으로 동쪽으로 보면은 배우남이라고 배우남 백운암이구나. 백운 흰백자 구름운자 백운암이라고, 동네가 열 댓호 있었는디 소개를 당했네.우리 마을로 합했어 우리 동네도 요 동네도. 거석 했으면 우리 동네 인물이 업었으먼 또 구례읍으로라디 소개 당해 소개 직전이였어. 저그 1950년(실제는 1948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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