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06_10_FOT_20170627_SJS_LJS_0003
    조사장소 :
    담양군 월산면 월평리 신평마을회관
    조사일 :
    2017. 6. 27
    제보자 :
    이주선(남, 1949년생)
    조사자 :
    박민숙 박수령, 김미정
    구현상황

    흥양이씨 삼정려문이 세워진 사연을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줄거리
    흥양이씨 집안의 효자, 효부, 열부 세 분을 모신 삼정려문이 봉산면 연동에 있다가 훼손이 되자 이곳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내용

    마을 입구에 보면 흥양이씨 삼정려문이라고 해 가지고 지금 있는데 최초에 만들어 지기는 1609년도에 세분 효자, 효부, 열부 이렇게 세분을.

    옛날에는 정부에서 교리나 이런 것이 없으면 정려문 같은 것은 못 만들잖아요? 비석도 마찬가진데, 정려문을 짓도록 해서 우리 일가들이 집성촌을 이룬 봉산면 연동에다 처음에 세웠어요. 근데 140 몇 년 지나가 가지고 다 허물어지고 터만 남아 있을 때, 효자하고 효부 되는 그 손자 대에선가 무가 되버렸어요.

    없어져 버리니까 열부, 이제 할머니가 나머지 12대조 할머닌데 열부 할머니, 광산 김씨인 후손들이, 증손자가 신평리에 살았는데, 그 증손자가 담양부사한테 얘기를 해 가지고 지원을 받아서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신평마을에다가 1753년도에 건립을 해 가지고 쭉 이제 집안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는 군에서 비지정문화재로 해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또한 250년 지나니까 그 동안에 집안에서 조금 소수선을 했는데 그래가지고 또 중수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제가 군청 기획실장을 근무하면서 2009년도에 군에다 얘기를 해 가지고 3,700만원 지원을 받았어요. 군비를.

    내가 인자 담양 다 회장도 맡고 있고 나하고 우리 파 종손은 서울에 산디 광선이라고 거기하고 또 이원철이 하고 같이, 물론 회사에다 맽겨서 계약을 해서 하기는 했는디단청도 새로 하고 서까래가 낡은 것은 새로 교체도 하고, 그래서 지금은 상당히 깨끗한 상태로 보존돼 있어.

    담도 새로 옛날식으로 돌담으로 해서 그렇게 맨들어서 길~다랗게.

    가시면서 보믄 알겄지만 그렇게 했는데, 그 세분들의 행적은 간단히 말씀을 드리며는 효자 그 분은 원래 그 생원시험은 합격했는데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셔 가지고 어머니 혼자 계시기 때문에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그냥 관계에 출석 않고 집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3년간 시묘살이는 물론이고 또 아퍼서 계실 때부터 옛날에는 변맛을 본다고, 노인들, 아프시면 변맛도 보시고 그래가지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제물을 직접 자기가 손수 장만도 하고 또 옮겨 가면서 그렇게 모셔가지고 사신, 전력이 알려져서 조정에서 정려문을 짓도록 이렇게 인자 맥이 떨어졌어.

    또 그 부인 경주이씨 그 할아버지 부인이 경주이씹니다. 그 분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에도 머리를 잘라버리고 두문불출, 밖에를 안 나가고 쭉 시묘살이 할 때 제수장만을 손수 허고 그것이 정부에 알려져 가지고 정려문을 짓도록 그렇게 돼 있습니다. 열부할머니는 그 효자인 형자 할아버지 조캅니다.

    그 열부가 광산 김씬데 1597년 정유재란 일어났잖아요. 그래서 이 마을에서 사시다가 용흥사, 그때는 몽선산이라고 했는갑대요. 기록에 보며는 그 고랑으로 피난을 갔는데 일본 왜적들이 그 절에가 불교유물이 많이 있었나 봐요. 옛날에 절이 굉장히 컸었다 그러대요. 용흥사가.

    불교유물을 찬탈을 하기위해서 그리 왔다가 주위에 수색한 도중에 그 할머니가 왜적에 발견이 돼 가지고 왼팔을 처음에 잡을라고 하니까 되게 꾸짖으며 이런 놈이 어딨냐! 하니 왼팔을 잘랐다고 그래요. 그러고도 또 다시 욕을 보일려고 하니까 또 꾸짖으니까 오른팔까지 잘라불고, 그래도 굴복을 안 하니까 목을 쳐서 돌아가셨는데, 그 때 아들하고 남편하고 같이 피난을 했다가 물론 남편은 안 잡혔으니까 안 돌아가셨겄제.

    근데 그 옆에서 아들이 있었는데 열 살 된 아들이, 같이 거기서 돌아가셨다 해서 인제 모자동승, 같이 순직했다 그래가지고 조정에 알려져서 정려문을 짓도록 해서 1609년도에 세분같이 모신 정려문을 한 번에 집안에 같이 쭉 자자유촌하고 있던 봉산면 연동리에다 세웠는데, 그것이 처음에 말씀 드렸지마는 훼손이 되가지고 그 증손자인 형구씨가 여기 신평마을에 열부 할머니 후손들이 살고 있으니까, 그 할아버지가 여기 사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때 부사에게 얘길 해 가지고 목재며 장정들, 기와 이런 것들 지원을 받아서 신평마을에다 세워서 지금까지 현존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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