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589_FOTA_20170511_KKR_HSO_002
    조사장소 :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금갑마을 제보자 자택
    조사일 :
    2017. 5. 11
    제보자 :
    황석옥(남, 87세, 1931년생)
    조사자 :
    김명선, 윤홍기
    구현상황
    제보자는 의신면 금갑리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에서 교련과 한문을 가르치다 퇴임 후 현재 진도문화원 콘텐츠반에서 활동 하고 있다. 고령임에도 기억력이 좋아 금갑리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과 유적을 역사적 사건과 연결해서 구술해주었다. 제보자 는 손(孫)을 빨리 보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중학교 6학년(20세)에 결혼을 했는데, 그 다음해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당시의 상황에 관한 경험담을 상세히 들려주었다.
    줄거리
    금갑진은 동서남북 200미터가 넘지 않은 작은 곳이지만 출몰하는 왜구들 때문에 해안 경비를 위해 800명 정도의 수군이 주둔해 오다가 1894년 갑오년에 폐지되었다는 이 야기이다.
    내용

    금갑진은 지금 보면 의미가 너무도 작아. 현대에 비해서 생각해보면 너무도 작기 때문에 소총의 유효 사거리 안에 들어 있을 뿐 아니라, 동서남북이 모두 200미터 를 넘지 못했어.
    왜적들이 총만 있었더라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인데, 물론 그 당시는 화살이었겠지만, 800명 정도의 수군이 주둔해 있었어.
    금갑 본도만 아니라 금갑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파견 초소 근무를 했던 모양이야. 금갑에 본진이 있고, 죽림 쪽, 초사리 쪽 대명리조트 짓고 있는 송군 쪽 일대에 진지를 구축해가지고 해안 경비를 했던 모양이야. 그렇게 유지해 오다가 침탈해 온 왜구를 한 번도 제대로 막지 못하고 피해를 보았다는 기록만 보았지.
    왜구를 잡아 보고하거나 치안을 유지 했다는 기록은 전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어.
    금갑진을 계속해서 유지해 오다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서 옛날 러시아, 청나라, 일본, 세 나라가 우리 한국을 자기 세력 안에 두기 위해서 각축전이 벌어졌어.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그 다음에 러일전쟁을 해서 이기고 나서는 1894년 갑오년에 그때 금갑진이 폐지되었어. 설치 연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1894년 금갑진이 폐지된 것은 어르신(父)한테 들었어.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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