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시다고 다슬기 국물을 내서 드시고 계시다가 한잔 주시며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일제시대 때는 식량이 보이면 모두 공출을 해 갔다. 굶어 죽지는 않게 하기 위해서 옥수수나 깻묵을 주었다고 한다. 여순 반란사건 때는 사람이 숨을 만한 곳은 모두 불을 지르고 집에서 수탈하였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짐꾼으로 쓰려고 데리고 가서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어르신의 어머니께서 꾀를 쓰셔서 무릎에 피가 나서 더 이상 못가는 걸로 위장하여 중간에 집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남은 식량을 전부 뺏어간거야. 공출을 하래. 인자 그때는 공출이라 그랬어.
인자 남은 식량은 전부 가꼬 가버리는 거야. 그런께 다 가져갈라고.
그런 조사도 하고 거 일본 직원들이 면 직원들, 인자 요 가택수색 해가꼬 심지어 쌀이 많이 있으면은 갖고가고 그런 조사까정 하고 댕겼어.
일본 놈들 지금은 일본 놈들하고 좋게 살아도 그때는 참 적이라.
싸악 농사지으면 그거 한마지기에 얼마 딱 배당을 해가꼬 싹 걷어가꼬 가쁠고 모재랜것은 자기들이 배급을 주면선 깻묵도 주고 뭐 묵도 못헐 옥수수 그런거 주고
그래가꼬 죽 써묵고 그런 사람들이 많지요. 근께 우리 속외나온 우리 나는 일곱살 먹어서 저기 요 골짜기에서 피난을 나왔어 요리, 요 동네로.
피난을 나왔어. 일곱살 묵어서는. 전부 저 안쪽으로는 거 전부 공산당 물든 사람들이 많아가꼬, 저 그 속외를 해븐거야. 지그 못살게.
그래서 전부 저 안에 사람들 우리동네 요래 많이 이사를 오고, 전부 집이고 뭐이고 싹 불대버리고, 불대버리고.
인자 그 말하자면 반란군들이 그런거이지. 그 요 인자 순경들이 그런거이재.
그 반란군들이 그 집에 산다고. 거기와서 먹고 산다고 인자 나락가마니 여놓은거 짚, 나락 훑고 짚 베 놓은거 논에다 해놓잖아요.
그러믄 거기에 들었는가 해벼보고 그 속에서 자고 그런다고 그런 것도 불 다 대블고 짚도 불 다 대블고 싸~악 요 골짜기 전부 그 사람들 세상이었었어.
그래가꼬도 그 안에 사람들이 요리 속외를 당해가꼬 묵고 살 길이 없은께 또 가서 농사를 지어야 되는기라. 저기 들어가가꼬.
그럼 경찰관들 데려가고 낮으로는 반란군이 없으니깐 가서 농사짓고, 밤에는 도로 이리 내려오고. 전부 이렇게 생활했어.
여그 산 사람들만 해도 그런 고통은 안 받았어요. 요 산 사람들만 해도 골짜기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을 많이 받았지.
그래가꼬 낮으로 가서 일을 하고 인자 해가 얼추 되 가면은 요 지서 식경 할 즈음에 우리 오빠들은 요 말하자면 요 양반보다 세살 더 잡...저그 다섯살 더 잡수고 그런 사람인디
인자 농사 지러 들어간다고 따라 가가꼬 같이 일하다가 인자 마~악 요 일하는 사람들이 인자 해가 몇 시 되가면 막 가자고 전부 설도를 해요.
얼른 나가자고. 반란군들 온께 얼른 나가자고 설도를 허는디 쪼까 뒤에 따라온 사람은 요 식경할 덕에 저 재를 타고 요 고지 요거 습격 해블라고 재를 타고 오믄서 전부 무기를 인자 막 포 막 요런 거시기를 메고 오다가.
인자 젊은 사람들 좀 남자들은 거시기한 사람들은 그러면 전부 지고 인자 그때 따라간 사람들은 못 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같이 메고 댕김서 자기들 맘에 안들면 가다가 어디 죽여쁠고 가고. 그래가꼬 우리 어머니도 인자 거기가서 일하고 쪼까 뒤에 온디 저쪽에서 그 사람들이 온께로 저쪽에서 해가 저리 넘어간디 저쪽에서 온께로 막 앞에 간 사람들이 얼른 오라고 막 손을 치고 막 연방 가는디
저쪽에서 옴시롱 해가 비춰서 잘 안보이더래요. 그래서 인자 저것도 우리 같은 가는 사람인갑다 하고 온께로 그 사람들이더래요. 반란군들이더래.
그래가꼬는 인제 말하자면 우리 인자 큰 오빠 된 사람을 짐지고 가자더래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친거 맹이로 퍽 앉아가꼬 뭉실뭉실허니 이런 돌이 있더래.
돌이 있어서 얼른 쉬가꼬 앉아가꼬 이야기하고 있는 순간에 발을 막 돌로 으득으득 허니 피가 질질나도록 잡아 문때브렀대요.
그래논께로 거지꼴한다고, 거지꼴한다고 한 여기서부터면 얼추 중기 가게만이나 짐을 져서 쩔뚝거림선 인자 그래논께 우리 오빠도 쩔뚝쩔뚝 하면서 못갈거맹이로 쩔뚝쩔뚝 거리고,
우리 어무니는 못오게 한께로 나도 같이 같이 가꼬 간다고 나도 좀 주라고 하고 같이 따라감선 죽어도 안보낼라고 따라가고
인제 그래쌍게 피가 질질나고 근께로 저만치 가다가 안되겄다고 가라더래요. 그래가꼬 와가꼬는 살았다고 얼마나 좋아하고 그랬어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생각이 안나겠는데 어찌 데꼬왔냐고. 그런 소리를 하고 그런께 여기 산 사람들은 그 거시기를 몰라요.
요 골짜기에서. 그 꼴짝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인제 순경들 데꼬가서 검문 서고 있는 사람들 요 동네 사람들도 대원들로 데려다 놓은 사람들, 와서 섞여놓은께 쫓겨가는 사람들,
총으로 쏴서 저그 여그 강가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난리도 아니여. 세상에나. 그 세상을 누가 알아요.
요 동네 사람들은 싹 요 화개로, 저 구례로 다 피난가블고
애나 없고 맨 마든 꼴짝사람들이 여기 와서 삼시롱 그렇게 애를 묵었어요. 참말로.
우리 또래 된 사람들이 전부 공부를 아무도 못했어요.
학교가 없어가꼬. 맨날 왔다갔다한께 학교가 어디에 있시야 학교를 댕기재.
학교가 있었지요. 그래가꼬 그거 그 학교 뜯어다가 여따가 갖다 짓고 그거는 학교는 없애부렀잖애.
그래가꼬 학교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고 말았재. 이 꼴짝사람들은, 우리 또래들은 그래서 대부분 여그 촌에 산 사람들은 우리 또래가 다 공부를 못했어요.
근께 열댓살 묵어븐께로 나이가 많아서 못가쁜께로 공부를 못허겄드라고.
일곱살 묵어서부터 열댓살 묵도록 그렇게 고생을 해놓고 살아논께로 인자 요런디 사람들은 구례라도 어디라도 요리 나가믄선 거시기허고 공부는 했는디.
이 꼴짝 사람들은 대부분 다 그래. 이 골짝만 그런게 아니라 다른디도 꼴짝에 산 사람들은 다 그래. 국민학교도 못댕겨부러써 일찍.
근께 내준께로 지그는 쌀밥만 묵어요. 근디 그런걸 갖다 준께로 그것 잡수지 말고 밥을 줌선 밥 묵고 가라고 밥을 먹고...
그래가꼬는 밥 얻어먹고 팽팽한 놈을 한 주먹도 못주서먹고 왔어. 하하하.
그러니께 여자들이라 논께 해코지를 안했재. 남자들 같으면 인자 말하자면 저그 인자 동네로 뭘 떨러 가면 데꼬가서 짐 지일라고 데꼬가쁜디,
여자들이 되논께 여기는 올데가 아닌게 얼른 가라고. 얼른 가라고. 아무한테도 그 소리 하지말고 얼른 가라고.
구례 저그 저그 문척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많았어. 문척 사람들. 우리 거기 있을 적에도 문척서 왔다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와있고, 오드라고.
요 문척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그...많이 들어왔어.
여그 여그 우리 동네 여그만 공산당 물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 한 사람도 없어가꼬 그 경찰관들한테 그 피해는 하나도 본 일이 없재.
그니깐 여그는 말하자면 지서 요놈이 있는 바람에 그것이 됬지. 지서 있어서.
여그 여그 검문소라고 있는데 이거 요고 바로 뙸둥 옆에 있는게 돌꽃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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