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1-14_04_MPN_20160711_CJH_PYH_001
    조사장소 :
    해남군 문내면 노인정 게이트볼장
    조사일 :
    2016-07-11
    제보자 :
    박영현(남·79세)
    조사자 :
    최재희
    줄거리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문내면은 창우씨라는 면장 때문에 학살이 적었다. 수복 후엔 용암리 인근에서 좌익으로 몰린 이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내용
    (조사자 : 6·25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었어요?) 박영현 : 초등학교 6학년. (조사자 : 여기 우수영도 좌익 우익해서 사람들 많이 죽이고 그랬나요?) 그럼 많이 죽었지 (조사자 : 어디서 했나요?) 학살은 울돌목에서 했어. 울돌목에서 지금 진도대교 바로 옆에가 모래해가 좀 있었어. 거기서 울을 따라서 죽은 사람들 나오라고 해서, 주민들이 나오라고 해서 안 나오면 무서우니까, 나와서 흙 덮어 버리고 덮어 버리고 해서, 거기서 교각을 만들 적에 뼈가 많이 나왔다고 해. 우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니까 다 알제. 지금도 기억이 훤 하제. (청중 : 인민군들이 민간인들을 많이 학살했어?) 인민군들은 절대 민간인들을 학살 안했어. 거기서 좌익을 가진 사람들이, 면단위가 있었지만, 부락을 얘기하면 안 좋은 게 많은데, 모사꾼들이 날쳐 버렸제. 혁명이라고 빨간 안장 딱 차고 한문으로 써갖고 그것만 차면 그때는 판결이 없어. 같은 일행이 전에 밥술이나 먹고 좀 배웠다고 하면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꼽제. ‘저 새끼 말이여 쌍놈새끼 지가 좀 배웠다고 있다고 무시하네.’ 이런 사람들이 역적 된 거야. 그러니까 끌고 왔어. 그러면 욕하면 보내버린단 소리야. 가서 죽여 버렸어. 손가락 하나로 죽고 살고 해버린 거야. 그런데 마침 그때 우리 면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면장이여. 창우씨라고 면장을 하면서 최대한 면민들의 학살을 줄였다는 거야. 그래서 그 사람은 그걸로 해서 다시… (청중 : 창우씨는 어디 사람이었어?) 선두리 사람인데 지금 제일내과 할아버지지. (청중 : 거기가 면장 했어요?) 인민군 때 (청중 : 그러니까 1950년 때 아니요?) 50년에 6.25가 났거든. (청중 : 6·25가 일어난 이후로 이야기여.) 그 당시 인천상륙작전 하기 전에 이북 공산주의 체제로 바뀌어졌어. 그런데 여기는 그걸 실천을 못했었는데 다시 복구가 된께, 창우씨는 그걸로 해서 오히려 죽은 사람이 많이 살아온께. 탄원을 많이 했제. 그래서 그 사람은 어디로 일절 어디로 안 갔어. 고생도 안하고. 문내면은 다른데 보다는, 진도에 비하면 아주 피해가 적었다. 그때는 어느 부락이고 전에 있던 사람, 배운 사람이 거기서 일꾼으로 살고 하는 사람들이, 완전히 그때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어. 인민군이 하루 저녁에는, 나는 공회당 바로 옆에 살았어. 그런데 공회당이 인민군 사무실이여. 우리 부락에 일개 중대의 인민군들이 주둔을 했었어. 그래서 일개소대는 선두리라는 부락에 있고 일개 소대가 주둔해서 중대 본부하고 비슷한데 갑작스럽게 통일돼서 떠나버리고 인천상륙작전이 시작이 된 것이여. 그래가지고 다시 1·4후퇴라는 것이 있어. 압록강까지 갔었는데 중공군이 개입해서 다시 후퇴한 거여. 수원까지 밀려가지고 다시 미국을 비롯해서 유엔군이 상륙을 해갖고 다시 격퇴를 해서 지금 현재 휴전선이 이루어진 것이여. (조사자 : 그 뼈들은 다 어떻게 했나요?) 무연고라 찾아갈 사람은 찾아가고, 그때 당시에는 중학생이었는데, 전쟁을 3년 7개월을 했어. 지금 용암리라는 데에 기역자로 팍 꺾어진 데 거기서 많이 죽였어. 경찰들이 데리고 와. 그러면 우리들보고 빨리 가라고. 그러면 쏴서 죽일까봐 무서워서 빨리 가제. 좀 있다가 탕 소리 나면 아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나고, 공부하고 가면 유가족들이 가서 찾느라고 울고 찾아 가는 것도 보고, 거기서 많이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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