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1-10_09_FOT_20160719_CSE_JHN_0001
    조사장소 :
    보성군 조성면 대곡리 198-1
    조사일 :
    2016. 7. 19 (화)
    제보자 :
    정형남, 70, 남, 대졸, 토박이
    조사자 :
    최성은
    구현상황
    조성면 한실에 사는 소설가 정형남 댁을 찾아 그동안 설화를 바탕으로 소설로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고장 출신은 아니지만 설화에 관심을 두고 취재한 분이라 도움이 적지 않았다.
    줄거리
    조성 대곡리에 희경이란 샘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와세다 대학을 나온 광주이씨 부자에게 시집온 옹주가 서울이 그리워 밤마다 샘가에 나와 한숨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을 바라보았다하여 희경샘이라 했다고 전한다.
    내용
    (예 여기 지금 한실에 왔습니다. 여기 동네에 대해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면은 말씀해 주십시오) 인자 여 희경마을이 여기가 희경마을인데 원래인자 저수지가 수몰된 한 80가구 거기서 거리 시집을 왔다고 부잣집에. (누가요?) 거 옹주가. (아 옹주가요) 에 옹주가 시집을 와가지고 에 그러니까 그 부잣집 아들이 일본 유학도 하고 했다고. (어디 학교 다녔다고) 와세다 대학 (아 와세다 대학) 응 와세다 대학도 다니고 그랬어. 장가. 거 옹주하고 결혼했다고 해서 여기 와서 사는데. 여기 얼마나 거 서울 궁에서 살다 외롭겠어. 그런께인자 이 지금 요 샘이 그 옛날 이 삼동 삼동네를 다 마셨다고. (삼동이라면 어디를 말합니까?) 여기 말하자면 지금 말하자면 중촌 희경 저 고장까지. (고장까지) 에 그래갔고 옆에 또 뭐 무슨 마을이라고 옛날 이 뭐. 기억이 안난다. 그렇게 해가지고 말하자면 저 대곡면 식수원이지. (아 대곡면의 가장 중요한) 에 중요한 식수원이지. 그래가지고 인자 달 밝은 밤이나 밤에 외로우면 샘가에 나와 가지고 저 한양 북쪽 한양 바라보면서 한숨짓고 그리워하고 그래가지고 희경샘이라고 했다고. (네) 희경샘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희경샘이라고 붙였습니까?) 그러께 인자 서울을 그 옹주가 늘 샘가에 앉아가지고 그리움에 젖어가지고 서울을 바란본다 해가지고 (바랄희(希)) 바랄희자 서울경자 (서울경(京)) 희경샘이라고 붙였는데 나중에 인자 중촌이 생기면서 이게 마을이 분화가 됐다고. 여기도 한실에서. (일제시대 얘기인가요?) 그렇지 일제시대 얘기여 와세다니까. 그래가지고 인자 이름을 여기를 희경이라 해라. 희경마을. 희경마을. 중촌마을, 고장마을 인자 그렇게 된거여. (예 그렇게 묶어서 대곡리라 했군요) 그렇제 대곡리라 했지. (음. 혹시 거 옹주하고 결혼했던 사람 성씨도 알 수 있을까요?) 언제나 광주이씨여. (광주이씨에요) 에 광주이씨. (한실에는 광주이씨가) 자작촌이제 (자작일촌) 그 자손 저 그 아들이 지금 이장하고 그라제. (아 제가 보니까 양진재공이 보성 땅에 왔을 때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한실이다 이렇게) 요요 위에 거 비 비석도 있어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라고 그 위에 저 산소도 있고 선산인데 거기인자 원래 거 어디냐 함양인가 군수를 하다가 하사를 받았제. 여기를. 봉토. 봉토지 일종의 (아 봉토. 사패지로 이렇게) 그러니께 사패지가 봉토여 (받았던 곳이다 이거죠) 예. 그럤제. 그래갔고 광주이씨가 정착하게 됐고. (예 옹주는 여기서 계속 살았답니까? 아니면은) 그뒤로 인자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든가 어짜든가 그것은 나 잘 모르겠어. (알겠습니다. 한실의 희경샘에 얽은 그런 이야기였군요. 알겠습니다) 그놈만 들으면 되겠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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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_09_FOT_20160719_CSE_JHN_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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