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1-10_02_FOT_20160512_CSE_LSY_0003
    조사장소 :
    보성군 벌교읍 장좌마을회관
    조사일 :
    2016-05-12(목)
    제보자 :
    유선엽(77, 여, 국졸, 토박이)
    조사자 :
    최성은
    구현상황
    보성 장좌리 마을회관에 들러 마을회관에서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쉬고 계시는 유선엽 님을 만나 장좌리 별신제, 도깨비 이야기에 이어 자신의 생애담을 들려 주셨다. 주변 부녀자들은 화투치느라 소음이 있다.
    줄거리
    유선엽씨가 어렸을 적 6.25를 만났는데 당시 어머니가 인민군에 총부리를 들이대면서 먹을 것을 요구할 때 침착하게 떡을 만들어 그들의 환심을 사서 가족을 구한 일이 있었다. 고흥 남양 작은 집으로 피난갈 때 하마터먼 죽을 뻔 했으나 다행히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내용
    (6.25때 겪었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우리들은 할 때는 인자 그때는 시골에 살아도 그렇게 뭐 가난하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저 놈의 보리밥묵으 죽먹으면 보리밥이라도 풍족히 먹고 이러고 엄니 아버지가 장사를 했기 때문에 먹고는 살았는디. 인자 그때는 막 집으로 반란군이고 막 들어 오쟎아요. 그때는 그래갔고 우리는 애기때 거 앞에가 우리집 앞에가 학교가 있어요. 근께 전부 집에서 못자게 해. 긍께 요놈을 손을 여그다 연거갔고 학교 마당에다가 척 밤새도록 앉치거놔.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뒤에 와서 인자 애기들을 몰래 빼다가 인자 집이다가 연거여. 여놓고 인자. 당신들만 가서 이러고 앉고있고 그러는디. 방에 불이 써졌거나 그러면 안되니까 방에다 못 나둬. 못나둔께 두루스루 앉겄어. 저녁이면 어찌게 이렇게 총소리가 징그런게 그냥 무서와. 그런께인자 옛날에는 엄니 아부지가는 거 솜이불을 문 앞에다가 치드만 못으로. 그 총알이 들어오면 솜에가 감아져갖고 있다고 그래갖고 인자. 쳐놓고 다 쳐놓고는 인자 한가운데가 앉었으라그래. 해나 배를 뚫고 들어올까 싶어서. 애기때 나가 그런 것 같애. 그래갔고 반란군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총을 들어댐서 안 쏼테니까 뭐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한거여. 그 사람들은 이북사람이여. 일본놈 같으면 쏴부러. 긍께인자 원래 지금있는 지방 폭도가 무서웠제 이북 사람은 안 무서워. 지방 폭도가 동네 들어와서 독자 좋은 아들들 다 죽여 버렸어. 지방 폭도가. 그래갔고 인자 총을 들어댄께 우리 어머니가 그러안도 오시면 줄라고 지금 떡을 하고 있다고 도구통에서 이렇게 콩떡을 이렇게 막 찧고 있어. 배가 고푼께로는 그리고는 얼른 앉그시라고 얼른얼른. 행여나 자식들 하나 해칠까 싶은께 부모들은 그런거이여. 그래갖고 떡을 해갖고 인자 방석에다 놔두고 콩가루를 놔두고 막 둥글둥글게 하얀...우리는 방에 있은 기척을 안한께 몰라. 이야기만 허제. 우리 어머니가 해 준거이여. 긍께 많이 잡숫고 싸 갖고 가라고 일행들이 있을거 아니냐고. 우리 엄니 말이 그래. 일행이 있을거이니 이놈 갖고 가서 갈라 잡수라고 그럼서 싸서 준 거이여. 글고는 간 뒤로는 총알 소리가 안나. 총알 소리가 안나. 근디 일본 놈들은 오면은 댐번에 쏴버려. 많이 죽었어 죽어. 근디 이북 사람들은 안 죽이드만. 얼른 안 쏴. 무섭기는 해도. 그렇게 쏴기는 안해 인자. 그랬더니 정갖고 우리는 고흥으로 피신을 갔어. 걸어서 차가 없은께. 피신을 요로코 가면 차가 오면은 어디든지 사람이 안뵈이게 숨어야 돼. 그러안하면 쏴부러. 댐번에 쏴부러. 잊그제께도 이야기를 했지만 이렇게 고개를 넘어서 걸어서 요로고 밑으로 싹 내려 가는디. 우리 이모하고 나하고 나는 쬐깐해서 갔는디 나는 인자 화장실이 매로운거여. 근께 이렇게 내려간디. 길이 요롷게 산길이 있는디 산 밑에 가서 나는 인자 오줌을 눴던가 모르것소. 그때는 모르겄소 그런디. 차가 이렇게 가드만 탁 서서 나한테 총을 들어댄거여. 사람이라. 우리 이모는 어떤 수통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없고. 애기쟎냐고. 쬐깐한 애기인디 저걸 뭐더러 죽이냐고. 그말이여. 차에서 그래 내가 거리가 좀 있은께. 애기니까 그냥 가자고 글드라고. 근께 탁 방아쇠 쏠라고 방아쇠 눌르는 소리가 나. 그래도 안 죽고 지금까지 살아오 그래갔고 인자 피신을 갔어. 피신을 간 거그는 고흥 근방에는 그런 것이 없어. 반란군들이 들어와서 뭐 그런 소리는 안 해. 그래갔고 거그 작은집에 가 있는디 거기서 인자 숨어 거기서 살아. 거기서는 아무 이상이 없어. 그래갔고 거까지만 들어 와갔고 인자 얼마 안있다가 그냥 얼른 끝났어. 6.25 6.25가 벼로 별로 질지는 않했어. 응 질지는 않해 갔고 그냥 괜찮아져서 인자 나와서 그렇게 살았을거에요 거. 여수반란때는 인자 우리는 그 저짝으로가 복잡했지 요쪽으로는 덜 복잡한께 그런걸 별로 못 못느꼈고. 여수 순천 요런데가 크게 됐지. 여수반란은. 요런대는 거 흔적만 됐지 뭐. 옛날 광주 뭐 5.18매니로 조그만 됐지. 그런 것은 피신한 것을 모르고. 그때는 어렸고. 근께 잘 몰라요. 6.25 당한 것은 어려서 그렇게 나는 당하고 살았다. (6.25라면 여기 장좌리에서) 장좌리에서 내가 안 살았지. 그때는 (그럼 어디 살았어요) 저기 동네에서 살았지. 인자 남교 있는디서 살았지 (남교쪽에서 살다가) 거기 살았어 (고흥 어디) 응 고흥 남양 (고흥 남양까지 피난을 갔다) 남양까지 피난을 갔다. 걸어서. 그때는 차가 없어. 차가 오면 하여튼 어디로 숨어도 숨어야 돼. 걸어가는 시간에 걸어가는 시간에 뭐 어디가서 숨어야제. 사람만 보면 쏴부러. 파파팍. 근께 차소리가 나면 들에 사람이 있다가도 전부 어디 또 죽어 불고 그때는 없어. 그래갔고 나도 죽을 뻔하다가도 알아가갔고도 피난을 갔어 가갔고 살도 안허고 지금까지 살고 있네요. 허허허허허.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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