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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장소 :
    영광군 홍농읍 칠곡리 칠암마을 서영후 자택
    조사일 :
    2016-10-07
    제보자 :
    서영후, 남, 1953년생, 토박이
    조사자 :
    박경숙, 남성자, 임준석
    구현상황
    칠암바위를 조사하기 위해 우연히 그 근처를 가던 중 ‘의병장 서종채’라는 비석을 보고 근처 집에 들어가 문의했다. 마침 문의한 집이 칠암마을 이장님 댁이었고 ‘의 병장 서종채’의 후손이였다. 조사자가 정중히 인터뷰를 청했다. 그리고 제보자는 관 련된 정보 자료를 제공해 주시고 또한 홍농읍과 관련한 그 밖의 내용도 조사가 이루 어질 수 있도록 협조하시겠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특히 제보자는 당시 헌열을 하면 서까지 직접 발로 뛰고 할아버지를 의병장으로 추서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과정 을 회상하면서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과거 역사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강 조하셨다.
    줄거리

    의병장 서종채徐鐘採26는 1880년 10월 15일 전라북도 무장에서 태어나 ‘침의針醫’로 생계를 하다 1905년 한일합방의 비보를 접하고 1907년 10월 전남 장성에서 기삼연의병장군에 참전했다. 이후 이대국 의병장군 밑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에는 부하들 을 직접 이끌었다. 그는 전북 부안군 하서면 일대에 거주하면서 일본과 내통하고 의 병활동을 저해하는 최용대를 결박하여 피살하였다. 특히 수명의 부하를 편성 인솔 하며 전남 담양 및 함평, 영광군과 전북고창, 무장, 부안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이끌 었다. 제보자는 조선총독부판사의 <판결문>27을 1978년도 판결문 사본을 입수하고 1932 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작성된 판결문을 토대로 조부를 의병장으로 등록하는데 힘썼 다. 판결문에는 서종채는 전북 고창군 무장면을 본적으로 하는 침의(한의사)였고 명 치 42년 5월 2일(1909년)에 폭도수개(의병장)로 고창군, 부안군 일대로 넘어 기삼연 부대에서 총포, 화약, 살인죄 등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내용 이었다. 서영후는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조부 서종채의 공적서 자료를 확보하 고, 1978년에 대구(대구교도서)까지 가서 조부의 수행인명부를 찾아 1980년도에 국 민장을 받게 되는 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해 왔다는 이야기이다. 제보자(서영후)는 영광군 홍농읍 칠암리 서종채 묘역이 조성된 근처(칠암저수지 위)에 살고 있다.

     

    26 자는 서응오(徐應五)이다.

    내용

    인자 서종채 의병장은 1905년도에 한일합병의 비보를 접하여 이제 분통이 여겨가지고 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헌 사람이에요. 허다가 국군이 침략되었고, 1907년 10월에 장성에 서 일어선 의병 기삼일 의병장 부대가 약 삼천명 정도 돼요. 거기에 참가해서 인자 큰 공을 세 웠고, 후에는 이대국 의병장이 크게 활약을 하는 등 후방에서 1908년 200명의 부대를 이끌고 총칼로 전라남북도 전남·전북 일원에서 많은 전투를 벌였어요. 이분들은 우리나라 의병사에 인자 이렇게 빛나는 공을 세우신 분으로 1907년 기삼일 부대에 참군해서 활약하시다 1908년 1월 2일 날 기삼일 의병장이 광주 서탑에서 이마무라 토벌대에 체포되어 피살되었어요. 그리고 1908년 이대국 의병장이 인자 선봉장으로 활약하시다가 1908년 5월 중순에 이대 국 의병장이 전투로 인해서 피살된 거예요. 그 정대헌, 정대홍 형제에게. 근게 1908년 인자 5월에 200명의 부대를 편성해서 전남 장성, 함평, 영광, 보성, 나주, 전북, 고창, 무장, 부안, 담양 약 9개 시군에서 활동을 했어요. 실제 했던 무대는 전북에서 했지만 전남 활동무대가 더 컸어요. 전북은 인자 부안군, 고창군 2개군이었지만 전남은 영광, 함평, 담 양, 장성, 보성, 나주 이렇게 6개 잖어요? 근게 실제적으론 전남에서 활동을 많이 허셨어요. 그 때 받은 임명장, 그게 우리 작은 어머니가 버선을 버슨다 해갖고 그 임명장, 의병대장 사열장이 읎어졌어요. 하튼 내 조부는 1907년부터 1913년까지 전남북 일원에서 의병 활동을 했죠. 1913 년도 6월경에 영광 백수로 의병을 구헐려고 갔었다고 해요. 이분이 한의사였는데, 근게 약초를 캐러오다가 중간에 고창군 공음면 그 뭔 주막에 갔는데 그 주막에 그때 당시 이분을 신고하면 상금을 많이 준다고 걸려있었다고 해요. 포상금을 많이 걸었어요 일본군에서. 그래가지고 아는 친구가 인자 밀고를 해가지고 그물막이 주막에서 체포되았어요. 그물막 이, 공음면 그물막이 주막이라고 있어요. 인자 그 주막이 1990년 전까지만 해도 거가 있었는 데 그 집을 내가 살려다가 못 샀네요. 그래가지고 그물막이 주막에서 체포돼가지고 1913년 10 월 광주 지방법원 전주이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13년 9월 27에 대구 복심법원에서, 지금 같으면 고등법원입니다.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확정돼서 옥고 치우다가 1916년 4월 22일 대구 형무소에서 인자 옥사했죠. 그래서 할아버지 시신을 옮겨오는데 할아버지 동생(작은 할아버지)이 일주일간 그곳에서 (형무소에서) 여기까지(무장 집까지) 말에다 시체를 싣고 걸어왔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이곳 칠암에 왜 거주를 허게 된고니, 이분이 돌아가시니까 이분의 장례를 무장에서 곧 치르고 아버 지, 저, 할머니와 함께 영광 칠암리로 이동을 해야 되는데 할머니가 거동을 못허니까 단가라고 할머니를 띔목을 만들어 네 명이 그걸 뜀고 홍농 이 마을까지 피난 온거에요. 여가 그래서 우리 칠암에서 아버지가 열한 살, 작은아버지가 아홉 살, 고모가 일곱 살. 그 리고 증조할머니가 나를 키웠어요. 근게 아버지가 글을 몰라요, 글을 모르니까 할아버지가 독 립운동을 했다고 의병대장만 했다고 허지 아무 기록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내가 인자 우리 큰 형님이 군인 소령이었었는데 작전처에 있었는데 그분이 수습을 다 못 해요(조부 일에 나서지 않아요). 다 포기를 했는데 내가 인자 4년 동안 이걸 찾으러(조부 관련된 기록들) 다녔어요. 이 기록을 찾을 때 이 수행인명부, 이걸 찾았어요. 제가 이 자체 <판결문>을 가지고 공적서를 작 성했죠. 수행인명부. 1978년도이죠? 7월 21일에. 그래가지고 어 여기에 인자 1심에서 사인에 2재, 인자 이건 6월 22날 광주지방법원에 직업은 침의고, 뭐 부른 이름은 뭐고, 뭐 그러죠? 대구복 심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사하셨다 허니까 대구 거까지는 제가 알았어요. 대구 교도소가서 이 기록을 찾으니까 대구에 없어요. 

     

     

    의병장 서종채 <판결문> 중(1)                       의병장 서종채 <판결문> 중(2)

     

     

    그래서 부산형무소 사건기록 관리과 거기서 이 <판결문>을 찾았죠. 여비가 없어가지고 내가 대구서 부산까지 갈 차비가 없어갖고 헌혈을 해갖고 갔다 왔어요. 내가 기가맥혀요. 그래가 지고 이 기록을 찾어 보니까 뭐 무기형 받고 총포, 화약 허고 살인죄고 그래갖고 그걸 공개를 못했어요. 그래가지고 김종필이가 박정희 대통령 때 일본허고 협상(대일청구권)을 할 때 만 명 분을 받었잖아요. 내가 서울 갈 차비가 없어가지고 서울을 못가니까 못 받았어요. 그 이후에 80년도에 이걸 인자 인정을 받아 국민장을 받았죠. 조부는 의병을 소집허는데 의원이니까 훨 씬 더 수월했다 허드만요. 전투를 하니까 인자 부상자들을 많이 치료해갖고. 부상자들 치료할 라고 약초 캐러 가다가 그 친구가 인자 현상금이 걸려있으니까 밀고 해가지고 일본군의 헌병 에 잡혔죠. 그러고 고창군 무장면 백양리가 우리 자자일촌 서씨들, 서가들이 많아요. 그때 그 불황긴 데 짚신, 버선들을 만들어줬다고 해요. 5일 간격으로 30켤레씩 고창 상하면 장불 노진사라고 있어요. 이분이 우리하고 일가가 좀 되야요. 집안으로 해서 고모할머니의 거그 뭐이나 되야요 그 분이. 그 진사 마루 밑 턱에다가 총 15자루, 화약고 일반 삼백매. 여기서 발견됐어. 이분 마 루 밑에다 진사 마루 밑에다 감춰놨다가. 이게 발견돼서 나중에 인자. 의병장 서종채는 인자 가족들의 심한 압박으로 현지에서 살지 못허고 바로 이쪽으로 와서 일주일 (만에) 바로 출상허고 일주일인가? 5일만엔가? 이쪽으로 밤에 몰래 부하들을 피신 시켰다드만요. 그래서 우리 가 여기서 살게 되았어요. 아쉬운 것은 인자 활동주소지가 전라북도라, 고창군이라. 거 내가 사당을 지을려고 추진 을 좀 허고 있어요. 이번에 사당을 그 재실이나 사당을 인자 이 위에다 지슬려고 하는데 그걸 문체부나 이런데 알아보니까 문체부나 보건측에선 30프로를 지원을 해줘 봉사비. 근데 나머지 50%는 인자 도비가 25% 군비 25%인데, 고향이 저 고창이다, 전라북도다, 그 래갖고 내가 사람을 시켜서 그때당시 내가 안 가 보고 해(알아) 봤는디 그렇게 얘기해서(잘 안 돼서) 그러다 내가 말았어요. 인자 나중에 행정소송이라도 해서 한번 도비나 군비나 한번 물 어볼 것이고, 그래가지고 제가 이 기록을 찾아가지고 인자 허기 때문에 의병에 대한 내용은 제일 많이 알죠.

     

     

    의병장 서종채 묘역

     

     

    27 1913년 광주지방법원전주지청 <판결문>(사본 본 서영후 제공자료) 사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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