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코드 :
    1-14_09_MPN_20160428_KKY_KHC_008
    조사장소 :
    해남군 송지면 어란로 447-5
    조사일 :
    2016-04-28
    제보자 :
    김학채(남,82세)
    조사자 :
    김경윤, 민경
    줄거리
    6.25 동란 때 인민군이 마을을 점령하고 이후 국군이 수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군과 경찰에 의하여 학살당한다. 진도 앞 갈매기 섬과 산정 앞 바닷가 산주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이다.
    내용
    인민군들이 이 저, 진주 해와갔고 정복을 했을 때, 여그 차지하고 있을 때에 그랑께 좌익을, 좌익으로 버리신 집안에서 학생들, 그 사람들 학생들 많했제. 거, 인자 산정다가 뭐 저, 그때, 오래되서, 사무손가 본분가를 해가꼬, 우리 저 통지를 하지. 그때 중학생들 오라고. 오므는 안가믄 안되니까 가제 인자. 가서는 인자 뭔 말도 듣고 인자 그라고 인자 이르케 오고 뭐, 거시기 뭐, 가담이라고는 볼 수 없고 그쪽으로 머리 쓴 쫌 거… 학생들 많이 있었어. 그때에. 그래가꼬는 인자 수복 후에는, 수복 후에는 으아, 또 인자 그 거시기 산 여그 저, 거가 강대영이까, 저 장 들으간디서 방앗간도 하고, 죽었어. 세상 떴어. 그라고 저 거시기 그 사람들이 인자 사. 목포 사범학교. 그때는 사범중학교제. 다닌디 인자 수복 후에는 또 그 사람들이 또 오라해. 오라해가꼬 좌익에 머리쓴 가족 자식들 또 고문당해고. 응. 고문당해고. 참말로 우리는 아무 거시기 없응께로 오라믄 가고 가라믄 또 오고. 그르케 해서 참 그 친구들 불쌍했어. 맞는… 맞고 으짜고. 그래가꼬는 인자 저 이르케 산정서 어란까지 오는데 여그 산지목이라고 있거든. 저 다리 넘어서, 어란서는 다리 넘어서이. 넘어서 오른쪽으로 움푹한 구덩이가 있었어. 거그다가 수복 후로 저 옥천 사람들이다고, 옥천 사람들이라드마. 그때에 잡어다가 막 싸 죽였제. 막 싸빌고 또 어란 저 강정재. 잔둥. 강정재, 거그서 그 저 우쪽으로. 오른쪽으로 보믄 산 중턱에다가 그 여 인민군들이 팠었어. 우리들 불러다가 각 호에 한 집씩 한 사람씩 나오라 해가꼬, 지금도 어란도 흔적이 있제. 조르라니 반공호. 산 중턱으로. 응. 그래가꼬 거그다가 모여 나두고 내 싸빌고. 그리고 저 어란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어. 저이 저 저쪽에. 창고가 있었는디 차로 경찰들이 인자 수복 후에. 인자 좌익으로 머리 쓴 사람들이제. 잡어다가 인자 막 싸놓고 싸놓고 배로 실고 가서 저 갈매기섬이라고 진도 밑에 갈매기섬. 갈매기섬에다 거그다 놔두고 다 총으로 싸빌고. 아. 우리가 저 산정 나가므는, 그 여 몇 군디가 시체가 여간 있었어. 여간. 그라고 인자 한번은 그랑께 산정. 그 저, 병원, 지금 호암의원, 그 앞에 거가 그 자리여. 바로. 거그다가 저 항년, 늘 그 본부가 있어가꼬, 인자 거시기 한디. 우리가 인자 그 있었는디, 경찰들이, 경찰들이 여 사람, 여럿이 데꼬 인자 총살시키러 가면서 우리를, 우리도 따러오라고 그래. 우리는 안 갔제. 그란데 저 우리 상급자들이 안 가믄, 인자 안 된다고 누구누구 가. 그랑께 가서 본디. 하. 그 저 아까 그 산지목 이르케 파논디, 여가 옥천이다고, 너 저 거시기 옥천사람 여 금방 올 것인께, 그랑께 옥천서 잡어왔던 모양이야. 그래가꼬 증인대면 안다고 그래가꼬 인제 싸 빌고, 싸서 죽여 빌고. 아이고 아침이믄 시체가 여그 저그서 도로가에가 있었고. 아이고 여그 주로 산지목에가 많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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